이화여자대학교 생명윤리정책
박사과정 김지경
얼마 전 EBS 국제 다큐 영화제가 막을 내렸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리우 올림픽보다도 EIDF를 통해 세계 속 다양한 사람들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드는데요. ‘다큐로 보는 세상’이라는 주제로 8월 22일 막을 올린 ‘EDIF 2016’은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 지구인들의 삶의 모습을 심층적으로 보여준 작품들을 소개하였고 28일 막을 내렸습니다. 전혀 다른 삶이라는 생각으로 영화 감상을 시작하지만, 이야기에 몰입하다보면 어느새 낯설음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들이 전하는 행복, 고통, 사랑, 고민, 꿈 등의 메시지들이 곧 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이런 공감을 통해 벅찬 마음을 갖게 되었고, ‘삶은 그 자체로 철학이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53편의 영화 중 제가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영화가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쇤더비 옙센 감독의 ‘내추럴 디스오더 Natural Disorder’입니다. 이 영화의 내용을 먼저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공 야코브 노셀은 한국에서 태어나 덴마크로 입양을 간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그는 총명하지만 신체 움직임이 불편하고 말이 어눌합니다. 그런 그에게 27년의 삶은 전쟁 같았지요. 그는 자신의 인생 경험을 통해 갖게 된 세 가지 질문을 바탕으로 자전적인 연극을 기획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나의 삶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이 영화는 야코브 노셀이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야코브 노셀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묻습니다. ‘나는 살 권리가 있는가?’, ‘나는 장애가 있는 아이를 갖고 싶은가?’, ‘정상성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들은 회피하기도 하고, 당혹스러워합니다. 야코브 노셀을 안심시키는 대답을 준비하려는 사람들도 안절부절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그에게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좀 더 희망이 될 만한 답을 전해주고 싶은 배려의 마음이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질문이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하였는데요. 바로 ‘인간은 (그 누구라도, 그리고 어떤 처지에 놓여있더라도) 존엄한가?’입니다. 그리고 미리 저의 대답을 말씀드린다면, ‘인간은 (정상성과 비정상성으로 구분지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서) 존엄하다.’입니다.
문제는 그 존엄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인간 존엄성은 생명윤리 담론에서 항상 전제가 되는 윤리적 가치입니다. 하지만 개념 자체에 대한 보편적 정의가 없이 논의되다보니 그로 인해 많은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코브 노셀의 질문을 통해 개념의 정당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과 처지를 불문하고 인간이 존엄하다고 주장할 때, 그 존엄함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선 존엄성에 대한 채셔의 정의를 통해 논의의 적절한 시작점을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채셔는 인간 존엄성이란 “인간적 기원을 갖는 모든 존재가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숭고한 도덕적 지위이며, 인간 존엄성은 주어진 실재이며, 인간 실체에 내재하고,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어떤 기능적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다.”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이 정의가 모종의 종족주의적 정의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인간은 악행을 저지르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뉴스 매체와 역사를 통해 인간이 때때로 숭고하지 않거나 존엄하지 않게 행동함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들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단지 야코브 노셀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가 존엄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패트릭 리는 상황적 존엄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요. 상황적 존엄성은 가변적 측면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즉 스포츠 정신에서 느낄 수 있는 존엄함 말입니다. 인간이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고 성취할 때 우리는 그가 인간 존엄성을 예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야코브 노셀은 사회 속에서 너무 허약한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스스로의 그가 스스로의 운명을 수긍하고 체념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그가 꿈꾸는 수식어로 정상적인) 인간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그의 현실에 만족하라고 하며 적당한 삶을 살기를 제안합니다.하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목표를 설정한 후에 이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인이었습니다. 결코 그는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에서 이해되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존엄한 삶을 살고 있고, 그가 꿈꾸는 아이의 장애 여부와 무관하게 부모로서의 자격이 있는 인간이었고, 정상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육체적 불편함의 하찮음이 그의 인생을 너무 고통스럽게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인터뷰에서 영화감독은 말합니다.
“우리는 배우자나 자식에게 최고의 기회를 주고 싶어하고 최고의 상대를 찾으려 하고 항상 특별하게 생각하지만 다르게 보이는 걸 두려워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정상이나 비정상을 두고, 남자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으면 이 사람은 다르다고 하거나, 야코브 같은 경우를 보았을 때 ‘이 사람이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들 말이죠. 그러한 비정상에 대한 반응이 정말 자기가 만든 건지 점점 집단적으로 되어 가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그 사이에서 논쟁과 증오, 전쟁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스킬을 가지고 사는 것 같지만, 인간은 외로운 존재입니다. 스스로 생각을 컨트롤해야 하고, 집단 안에 속해 다수 의견에 휩쓸리고 다르게 보면 전쟁이 날 수 있다는 생각 안에 살죠.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진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감독은 정상성이란 결핍의 인식이라고 나름의 결론을 내립니다. 이런 측면에서 야코브 노셀처럼 스스로의 정상성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어떤 결핍은 정상성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됩니다. 여러분은 야코프 노셀처럼 자신의 결핍을 인식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인가요? 저는 이 영화를 통해 저의 부족함을 맞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심을 하자마자 이 글을 쓰면서 충분한 결핍의 감정을 느끼고 있네요. 정상성을 향한 시작인가봅니다.
<참고문헌>
(1) http://www.eidf.co.kr/dbox/movie/view/234
(2) Cheshire, William, “Toward a Common Language of Human Dignity”, Ethics & Medicine 18.2, 2002, p.10.
(3) 이화인문과학원, 『인간과 포스트휴머니즘』,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3.
남들과 다르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히 강한 현상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외국 감독도 동일한 감정을 표시했군요. 역시 사람들은 다르면서도 비슷한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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