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윤리정책협동과정 박사과정 김지경
요즈음 광화문 광장은 매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끝없는 국정농단과 정부의 후안무치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와 허탈감을 표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고 있지요. 그런데 광화문 촛불집회의 열기가 한창 달아오르기 얼마 전인 2016년 10월 15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 모였습니다. ‘죽음’이나 ‘절망’을 상징하여 불의에 저항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검은색. 시위에 참여하는 이들은 검은색 옷을 입고 모여서 암울한 시대를 애도하면서 죽음의 투쟁을 합니다. 우리나라의 검은 시위는 폴란드의 ‘검은 월요일’ 시위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작되었습니다. 왜 그들은 검은 옷을 입고 비장한 각오로 거리에 모였을까요?
시위가 있기 전인 2016년 9월 22일, 보건복지부는 ‘비도덕적 진료 행위 처벌강화’에 관한 개정안을 입법예고 하였습니다. 허가받지 않은 주사제 사용, 대리수술 등 8가지 유형으로 세분화한 행위를 통해 의료인의 비도덕적 진료행위를 구체화하고 이를 규제한다는 측면에서 이 법안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부 항목에 임신중절수술이 포함되면서 여성계와의 뜨거운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낙태 수술은 불법입니다.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합니다. (형법 제 269조 1항) 그러나 모자보건법에 따라 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산모 본인이나 배우자가 유전학적인 정신 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특정 감염병에 걸린 경우, 강간 또는 준 강간에 의해 임신한 경우, 근친상간인 경우, 임신이 산모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경우 등입니다.(모자보건법 제 14조) 이번에 입법예고한 개정안은 낙태수술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며, 다시 한 번 뜨거운 논란이 제기되었습니다. ‘태아의 생명권이 소중한가?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권리가 중요한가?’가 이 문제의 핵심 쟁점이 될 것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낙태 반대를 주장하는 단체들은 스스로를 ‘pro-life(친생명론, 낙태반대론)’라고 부릅니다. 한국에도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있습니다. 이들은 낙태금지법을 주장하는 등 생명을 소중히 하고 지켜가겠다는 그들의 가치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프로라이프 의사회 차희제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정부 규제 방안을 반가워하는 입장을 표현했는데요. 특히 지난 40년 동안 거의 2000만 명에 달하는 태아가 안타깝게 생명을 잃었다는 점에 유감을 표하고. 사회ㆍ경제적 기반 구축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낙태를 허용한다는 주장은 생명존중과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소중한 생명은 일단 낳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산부인과 의사나 법조인들이 ‘낙태는 할 수 있는 것, 해도 큰 문제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여성들은 안전한 낙태가 여성의 기본권임을 강조하면서 낙태 금지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원하는 임신을 할 자유가 있는 것처럼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프로 라이프와 대비된 이들의 입장을 ‘pro-choice(선택 옹호론자)’라고 합니다. 프로 라이프들은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낙태 찬성론자로 오해하는 문제가 종종 발생하는데,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닙니다. 칼럼니스트 김서화는 낙태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낙태 찬성론자로 규정하는 순간 낙태는 선택이 아닌 죄의 문제가 되며, 임신 상태를 ‘모성의 전조’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는 임산부에게서 오로지 아이만을 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해 맥락이라면 낙태는 살인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은 그 현상의 앞뒤로 폭넓은 함의가 있습니다. 원치 않은 임신 전에는 불완전한 피임이 있고, 뒤로는 출산과 양육에 대한 고민들이 길길이 놓여있습니다. 낙태 선택은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느냐의 문제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상황들을 고려하여, 마땅한 대안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이 아이를 낳는 것이 나은지 아닌지를 고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최우선권을 가진 이들은 태아와의 관계에서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인간, 임신 가능한 당사자여야 합니다.
산부인과 의사들 역시 이 입법안에 대해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들은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 범위 등을 규정한 현재의 모자보건법은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임신중절의 99%는 ‘원치 않는 임신’ 때문임에도 산부인과 의사의 처벌 강화로 모아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산모가 원치 않아서 낙태수술을 했을지라도 남편이나 남자친구 등 다른 보호자가 고소·고발을 하면 의료진이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의사가 합법적인 낙태수술까지 피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정부안대로 낙태 수술에 대한 처벌이 강화된다면 낙태 수술 전면 중단을 선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임신 4건당 1건 꼴로 낙태가 이뤄지고 있을 만큼 낙태 논란은 전 세계적 논의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낙태를 허용한 국가와 허용하지 않은 국가 간 낙태율은 차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점은 선진국의 낙태율은 줄어드는 데 비해 개발도상국은 큰 변화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가난한 국가일수록 여성들이 사전에 임신을 막는 피임약을 쓴다거나 자녀를 몇 명 나을지에 대한 가족계획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김동석 의사회 회장은 “현행법상 낙태는 불법이지만 임신한 중·고등학생, 이미 자녀가 여러 명인데 피임에 실패한 부부 등 현실에서 낙태수술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며 “낙태를 합법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의료인을 처벌하는 것으로 모든 책임을 묻기보다 낙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먼저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의료행위로 몰아가면 결국 의료기관이 아닌 곳에서 비의료인에 의한 낙태, 다른 나라로 떠나는 원정 낙태 등의 위험만 커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는 무조건적으로 안 된다기보다 산모의 건강이나 경제적 사정 등을 충분히 반영해 합법적인 낙태가 이뤄질 수 있도록 현실에 맞는 법 개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입법예고 기간 만료 후인 11월 11일, 보건복지부는 의료계 및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수정안을 밝혔습니다. 당초 비도덕적 진료행위를 8가지로 정하였으나, 수정안에서는 진료행위별로 국민에게 미치는 위해 정도를 고려하여 6가지로 유형화하고, 논란이 되었던 불법 임신중절수술도 종전과 같이 행정처분 대상에 포함하였습니다. 다만, 불법 임신중절수술은 형법 위반행위로 표현을 변경하고, 자격정지 기간은 현행과 같이 1개월로 유지하되, 종전과 같이 사법처리 결과가 있는 경우에 한정하여 처분키로 하였다고 보건복지부는 밝혔습니다. 이 수정안을 놓고 볼 때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낙태수술이 여전히 비도덕과 동일한 것이라 간주하는 것은검은 옷을 입고 시위를 참여했던 사람들의 비장함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 사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생명 존엄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고, 프로라이프의 입장도 헤아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법안이 누군가의 삶의 맥락에서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 폴란드의 검은 월요일: 2016년 9월 3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중심가의 광장에는 검은 옷을 입은 3만 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시위대는 이 날을 ‘검은 월요일’이라고 부르며 “나의 자궁은 나의 선택”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집권 극우정당인 ‘법과 정의당’이 추진하는 낙태 전면금지법 때문이다. 가톨릭 인구가 많은 폴란드는 성폭행을 당해 임신이 된 경우, 근친상간에 인한 임신, 출산이 산모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낙태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법과 정의당’은 이런 경우조차 낙태를 금지하고 낙태를 하는 경우 임산부와 집도의에게 최대 징역 5년형에 처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을 추진하였다. 시위대는 낙태 전면금지법은 여성들의 기본적인 생식권과 인권을 침해하고 나아가 자신들의 안전과 존엄까지 위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거센 반대여론에 의해 결국 지난 6일 낙태 전면금지법은 입법이 무산되었다. 야르슬로 고빈 폴란드 부총리는 “낙태 전면 금지는 없을 것이다.”며 “시민들의 시위는 우리에게 겸손함에 대해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참고문헌>
(1) 한국언론진흥재단, <다독다독> 2016-10-18 이슈연재 http://dadoc.or.kr/2380
(2) 차희재, <평화신문> 2016-10-30 기사 http://www.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657844&path=201610
(3) 김서화, <프레시안> 2016-11-25 기사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4890&ref=nav_search
(4) 김양중, 안영춘 <한겨레> 2016-10-17 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health/765888.html
(5) <연합뉴스> 2016-05-12 기사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5/12/0200000000AKR20160512083100009.HTML?input=1195m
지난 정권에서 저출산 대책의 하나로 사문화되다시피 한 낙태죄 처벌 강화가 거론되었던 적이 있는데,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 치고는 참으로 치졸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낙태에 대한 처벌 강화가 혹시라도 우리나라가 당면한 초저출산율과 묘하게 연결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직 생명윤리적 관점에서 우리 사회가 콘센서스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좋아요Liked by 2 peo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