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생명윤리정책협동과정
석사과정 김 남 희
창백하고 생기가 없는 얼굴, 아이답지 않게 성숙한 표정. 무엇보다 이 아이는 여자아이일까요, 남자아이일까요. 이 초상화는 디에고 벨라스케스 작품으로 그림의 아이는 17세기 스페인을 통치한 펠리페 4세의 아들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입니다. 오늘은 여자아이 옷을 입은 왕자의 그림을 소개하는 것으로 연명의료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스페인 왕가는 전통적으로 고귀한 혈통 간의 혼인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때문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제외한 오스트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독일의 제후와 같은 한정적인 국가 간에 혼인만이 이루어졌지요. 그것도 수 세기 동안 말입니다. 결국 다른 국가에서 배우자를 맞이해 온들 따져보면 근친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프로스페로 왕자는 5대 간에 걸쳐 이루어진 근친혼의 결과였지요. 근친혼의 아이는 유전학적으로 희귀병을 갖고 태어나거나 면역력이 낮은 경우가 많습니다. 왕자의 얼굴이 창백하고 생기가 없는 건 그에 기인한 것이지요.
생(生)이 꺼져가는 왕자를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왕가는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 왕자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했지요. 그 노력이 왕자의 복장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왕자는 건강을 기원하는 약초 꾸러미를 달고 여자아이 옷을 입고 있습니다. 사신이나 마귀의 존재를 믿던 시절, 남자아이가 여자아이 옷을 입으면 이들의 눈을 피할 수 있다 믿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풍습은 왕자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동복이라는 개념이 없어 어른들의 옷을 작게 줄여 아이에게 입혔습니다. 즉, 왕자는 저 옷 아래 꽉 끼는 코르셋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병약한 왕자가 성인 여성에게 조차도 심폐기능과 소화기능에 지장을 주었던 코르셋을 끼고 다닌 것입니다. 결국 왕자는 4살에 죽음을 맞이했지만, 코르셋 탓이라기 보단 근친혼에 의한 유전병에 기인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왕자의 생명을 이어주리라 여겼던 옷이 살아있는 동안 그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갑자기 그림을 소개한 이유는 이 오래된 그림이 오늘날 연명의료 현장에 놓인 아이들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매달린 약초꾸러미는 작은 아이 팔에 꽂힌 수많은 링거줄을, 답답한 여자아이 옷은 아이가 사용하기에 버거운 산소호흡기용 산소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이는 살아있음 그 자체이지만 드리워진 죽음 앞에서 그 살아있음이 아이를 고통스럽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1살이 채 되지 않은 찰리는 미토콘드리아 결핍증후군(Mitochondrial DNA Depletion Syndrome, MDS)를 앓고 있습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에 존재하는 소기관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미토콘드리아가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 희귀병 탓에 찰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울 수도 없습니다. 호흡기 등 연명의료장치가 없으면 삶조차 이어나갈 수 없는 상태이지요. 이에 찰리가 입원하고 있는 그레이트 오몬드 스트리트 병원은 찰리의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후 고통스러운 연명의료를 중단하자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찰리의 부모는 이를 거부합니다. 미국 컬럼비아대 병원 히라노 교수가 자신이 개발한 실험적 치료가 찰리의 상태를 호전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치료는 ‘TK₂’ 유전자 변형을 앓고 있는 일부 환자에게만 효과가 있었고, 찰리가 겪는 ‘RRM₂B’ 유전자 변형에 대해서는 전혀 적용된 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찰리의 부모는 이를 근거로 연명의료중단을 거부했고 결국 법적 공방으로 이어졌습니다. 찰리의 부모는 영국 고등법원에서 패소하고 이어 유럽인권재판소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유럽인권재판소도 ‘고통이 나아질 어떤 현실적 전망도 없는 상황이 길어진다면 찰리가 엄청난 고통을 받을 수 있기에 병원의 연명의료중단을 합법적으로 판단했다’는 입장을 밝히고 ‘실험적 치료는 효과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습니다.
잇따른 패소에도 찰리의 부모는 그들을 지지하는 언론과 후원으로 입장을 고수하는 듯했으나, 진단을 위해 영국을 찾았던 히라노 교수가 찰리는 실험적 치료를 하기에도 너무 늦었다는 결론을 내리자, 연명의료중단을 받아들입니다. 찰리는 호스피스 시설로 옮겨졌고, 2017년 7월 28일, 연명의료장치를 제거한지 하루 만에 숨을 거두게 됩니다.
찰리에게도, 프로스페로 왕자에게도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 고통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그들이 살아있기만을 바란 점에서 같지요. 하지만 여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로 프로스페로 왕자에게는 ‘인간으로서 존엄한 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왕자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끔찍한 코르셋을 차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찰리가 입원했던 병원의 의료진과 유럽인권재판소는 소생이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의학적으로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치료의 중단이라는 ‘존엄사’에 입각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적어도 찰리는 고통스러운 연명의료장치를 떼어낸 후 숨을 거두었지요. 아직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지만 앞으로 우리는 누구를 어떻게 죽게 할 것이냐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의 경우에는, 의사를 표현할 길이 없는 아이의 연명의료중단을 의료진이나 법원이 결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부모라면 아이에게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강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 논의되어야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 나카노 쿄코, 『무서운 그림 3(위험한 진실의 명화들)』, 세미콜론, 2010.
– 손고운 기자, 희귀병 앓는 아기 연명치료 중단 판결 논란, 문화일보, 2017년 06월 28일,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7062801071009312001
– 연합뉴스, 찰리는 떠났지만 ‘불치병 윤리논쟁’ 남았다, 2017년 07월 30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7/30/0200000000AKR20170730019400009.HTML?input=1195m
– DAN BILEFSKY, Parents of Charlie Gard, Ill British Infant, Abandon Effort to Prolong His Life, The New York Times, JULY 24, 2017, https://www.nytimes.com/2017/07/24/world/europe/uk-charlie-gard-parents.html
– DAN BILEFSKY and SEWELL CHAN, For Parents of U.K. Infant, Trump’s Tweet Is Latest Twist in an Agonizing Journey, The New York Times, JULY 4, 2017, https://www.nytimes.com/2017/07/04/world/europe/charlie-gard-uk-infant.html
연명의료 중단의 결정이 환자가 고령인지 아니면 어린아이인지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오로지 소생 가능성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매우 어려운 문제네요.
좋아요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