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연구와 취약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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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선언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가 시행한 인체실험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1947년의 뉘른베르크 강령을 수정 보완하여 만든 규범입니다. 기존의 뉘른베르크 강령이 재판을 위한 법 제정에 무게가 실렸다면, 헬싱키 선언은 의사들 스스로 연구 윤리에 관한 전문적인 지침을 만들 필요를 자각함에 따라 채택됐습니다. 인간 대상 의학연구의 윤리 원칙에 따라 헬싱키 선언은 37개의 조항을 통해 의학 연구 윤리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의학연구는 크게 치료목적인 연구와 치료목적이 아닌 연구로 구분되는데 이는 헬싱키 선언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요, 196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개최한 제18차 세계의사회 총회에서 채택하고 1996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소머셋 웨스트에서 개최한 제48차 세계의사회 총회에서 제4차 개정한 <세계의사회 헬싱키 선언: 인간 대상 의학연구 윤리 원칙>에 따르면 의학 연구는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유형 1은 환자에게 중요한 이익이 되는 실험, 의사의 관리하에 이루어지는 의학 연구(임상실험)이고, 유형 2는 피험자를 위해 진단이나 치료의 직접적 가치가 없는 순수한 과학적 목적의 실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치료목적이 아닌 생명의료 연구입니다.

 

의학연구를 두 가지로 구분함으로서 실험이득의 평가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실제로 임상 실험에서는 실험 대상자의 이득 유무와 무관하게 실험이 배당되고, 분류를 명백히 할 수 없기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적의 유형과 위험이 항상 비례하지는 않기 때문인데요. 가령 심리테스트는 위험이 미미하지만 순수 과학 실험인 유형 2로 분류되지만, 장기 등의 이식 실험은 위험도가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유형 1로 분류됩니다. 따라서 최근의 헬싱키 선언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더 이상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임상실무에서 인간 대상의 의학 연구는 치료행위, 치료실험, 인간실험의 3가지 유형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구인회, 2003). 하지만, 병원에서의 치료행위, 치료실험, 인간실험의 3가지 유형 역시 서로 정확히 경계를 구분 짓기는 어려운 대상입니다. 인간 대상 실험 윤리에 관한 지침은 여전히 논의 중이지만, 취약한 집단 및 개인에 대한 조항은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돼 있습니다.

 

2013년 10월 브라질 포르탈레자에서 개최한 제64차 세계의사회 총회에서 제7차 개정한 헬싱키 선언에서 ‘취약한 집단 및 개인’에 관한 조항을 보면,

 


  1. 일부 집단과 개인은 특별히 취약하여 부당한 취급을 받거나 추가적인 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 모든 취약한 집단과 개인은 특성에 맞게 배려된 보호를 받아야 한다.

  2. 취약한 집단과 함께하는 의학연구는 오직 이 집단의 건강상의 요구나 우선순위에 부합하는 연구이고, 취약하지 않은 집단에서는 수행할 수 없는 연구일 때 정당화된다. 더불어, 이 집단은 해당 연구결과로 얻은 지식, 의료행위, 또는 시술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 전공은 언어병리학(Speech-language pathology)으로 말과 언어 및 청각 장애와 관련해 의사소통 장애를 예방, 진단, 및 치료하는 학문입니다. 자연히 언어로 의사소통을 시작하는 어린 연령의 대상자를 상대적으로 많이 만나게 되고, 발달 장애 등의 동반 장애를 가진 장애인들도 자주 만납니다. 아직 임상에 있지 않고 석사 과정 학생인 저는 이들을 대부분 연구 참여자로 만나게 되는데, 적게는 만 2~3세에서 많게는 초등학교 연령대의 아이들과 연구를 진행하다보면 취약한 집단 및 개인에 대한 연구 윤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낍니다.

 

물론 연구에 참여하는 취약계층은 상기한 뉘른베르크 강령과 헬싱키 선언 외에도 국가생명윤리심의원회의 <생명존중을 위한 선언문>을 참고해 반드시 연구 참여 동의서를 작성합니다. 하지만, 미취학 아동 등에게 ‘연구’라는 개념을 확립시키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동이 실제로는 연구에 참여하고 있지만, 대상자 스스로는 연구 목적이나 연구 참여에 대한 이익 혹은 그에 따른 손해에 대한 지각이 없이 어떻게 보면 부모 혹은 교사의 권유나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헬싱키 선언에 따라 연구자는 보호자에게 연구 목적과 실험의 위험과 이득, 진행 경과를 알리고 실험을 시작 및 진행, 종료하지만 피험자인 아동이 실험 과정에서 참여의 절대적 자유와 실험 중단 요구를 알 리 만무합니다. 이는 아동뿐만 아니라 취약 집단에도 적용됩니다. 이때 취약 집단은 장애 집단뿐만 아니라 정신적 능력이 제한된 성인이나 미성년자 모두를 포함합니다.

 

미국에서는 동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연구를 진행할 때 기대되는 위험이 “최소한”일 때만 연구가 허용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최소한의 위험”에 대한 명확한 경계를 제시하기 어렵고, 모든 경우의 잠재적인 위험까지 고려할 수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연구를 진행할 때는 연구자가 연구 책임자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피험자의 참여 자율권을 전적으로 보장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연구가 피험자에게 어떤 위험과 이득을 초래할 수 있는지 심도 깊은 고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

  • 구인희, “동의능력이 없는 어린이 피험자 중심으로 살펴본 임상실험의 윤리적,법적 문제”, 『법철학연구』, 2003, 6(2), pp. 179-204.
  • 대한의사협회, “세계의사회 헬싱키 선언: 인간 대상 의학연구 윤리 원칙”, 『대한의사협회지』, 2014, 57(11), pp. 899-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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