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월 31일, 진료를 보던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고(故) 임세원 교수의 유가족들은 학회를 통해 두 가지 부탁을 남겼다고 합니다. 안전한 진료환경을 만들어달라는 것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편견과 차별 없이 언제든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유족은 고인의 뜻을 전하며 대한정신건강재단에 1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월, 여당은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의 제안에 따라 일명 ‘임세원법’ (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 정신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하였습니다.
현행 법률은 구 정신보건법의 ‘비 자의입원’ 조항이 환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받아 개정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국제적 정신보건의 방향이 정신장애 치료 및 예방 위주 모델에서 정신건강 증진 모델로 이행하는 것을 반영하여 강제입원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임세원 법’ 에는 이러한 강제입원절차를 다시 간소화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또한, 퇴원 사실을 환자의 동의 없이 정신 건강복지센터장에게 통보하는 것 역시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법률과 제도를 고치는 것이, 그것에 의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이들의 현실과 목소리를 잘 반영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법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반의 조성이 필수적입니다. 법의 이념이 아무리 숭고할지라도,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프라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그 이념은 종잇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정신건강 복지법을 개정보다 중요한 것은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하여 다양한 인프라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정신 건강복지센터 정신건강 전문요원 확충, 사례관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통합 정신건강 사례관리 시스템 구축, 정신질환자의 자기 의사결정권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공공후견인 사업, 지역사회 복지서비스 및 인프라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인프라 확충 없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 중 하나인 정신질환자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될 수 있을지, 그들의 삶이 좀 더 개선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합니다.
실제로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은 입원이 장기화 된 이유(중복응답)에 대해 24.1%가 ‘퇴원 후 살 곳이 없기 때문’ 이라 답했고, 22.0%는 ‘혼자서 일상생활 유지가 힘들기 때문’, 13.3%는 ‘병원 밖에서 정신질환 증상관리가 어려워서’, 8.1%는 ‘지역사회에서 회복/재활을 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없기 때문’이라고 응답했습니다. 정신의료기관에서 퇴원한 환자들이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이 현재 그들이 처한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대한민국과 국민소득 및 생활 수준이 비슷하지만, 정신보건 의료서비스에서 보다 선진화 된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대만과 우리나라를 비교해보면 정신질환 환자들을 위한 인프라 확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대만은 국가에서 책임지는 의료의 비중이 한국과 비교했을 때 매우 큽니다. 또한, 강제 입원 비율이 국내의 절반 수준이며, 환자들에게 월 6일 자유 외출과 외박을 권장하는 등 병원을 격리시설과는 다르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정신병원에서 사회로 복귀하기 전에 거쳐 가는 중간 지점인 ‘Half way House’를 마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단순한 주거시설이 아니라 직업 재활프로그램을 통해 정신질환자의 독립생활을 돕는 곳입니다. 대한민국은 정신의료기관에서 퇴원해 지역사회로의 복귀전까지 단기간 재활훈련을 통해 집 혹은 주거시설로 연계하는 시스템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대만은 체계적인 직업훈련을 통해 사회적 능력 배양을 중점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만은 개별 맞춤형의 작업치료사를 통한 직업 재활훈련과 상품제조 및 판매 등, 취업교육을 지속시켜 정신질환자의 취업률도 높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간 집 개념인 Halfway House가 5500여 개에 달합니다.
정신질환자들의 입원이 장기화 되는 가장 큰 이유가 ‘퇴원 후 돌아갈 곳이 없음’인 것으로 보았을 때, 대만과 같은 사례를 참고하여 우리나라에 도입하여 환자들이 퇴원 후에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고 임세원 교수님이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법률을 개정하고 제도를 고치기에 급급한 우리의 모습과 현실을 돌아보고 환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참고자료>
-정신장애인, 갈 곳 없어 입원하는데…‘임세원법’ 역주행 우려, 2019.02.27. 오마이뉴스<http://m.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15263&CMPT_CD=RPORT>
-개정 논란 ‘정신건강복지법’ 현행법, 본래 취지 달성 못해, 2019.03.12. 메디파나뉴스. <http://medipana.com/news/news_viewer.asp?NewsNum=235756&MainKind=B&NewsKind=61&vCount=20&vKind=1&Page=1&sWord=&Qstring=sWord%3D%26sDate%3D2019-03-12>
-해외 정신보건의료서비스 ‘탈수용화’ 어떻게 이뤄지나?, 2018.03.22.의학신문 <http://www.bo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80169>
-민주당의 ‘임세원법’은 反임세원법?, 2019.02.12.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6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