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서 발생한 ‘알톤 로간’ 사건을 아시나요? 이는 1982년 1월 11일, 시카고의 맥도날드 매장에 강도가 들어 경비원 한 명이 총살당하고, 또 다른 경비원이 중상해를 입은 사건입니다. 알톤 로간은 그가 총을 쏘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의 진술에 의해 살인자로 지목되어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 사건은 엄청난 반전을 맞게 됩니다. 시카고 경찰 2명을 상해한 혐의로 체포된 ‘앤드류 윌슨’이 국선 변호인에게 맥도날드 강도 살인사건의 진범이 본인이라는 고백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윌슨은 본인이 죽기 전까지 이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요구하였고 변호사는 비밀 유지 의무를 준수하여 윌슨이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결국 알톤 로간은 윌슨이 사망한 후에 밝혀진 진실로 인해 26년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변호사의 비밀유지의무의 예외가 인정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대한 당위성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변호사의 비밀유지의무의 예외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의뢰인에 대한 변호사의 비밀 유지 의무의 예외를 어느 상황에서 인정할 수 있을지와 의뢰인과 변호사의 신뢰는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관점 사이에는 모순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력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의사와 환자의 관계입니다. 의사는 직업 특성상 환자의 예민한 사생활까지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 환자의 비밀과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비밀을 유지하는 것은 의사가 가진 중대한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의사의 환자에 대한 비밀 유지 의무는 법적으로 어떻게 규정되고 있을까요?
우리나라에서는 형법과 의료법에서 의료인의 환자에 대한 비밀 유지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형법 제317조 제1항은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등은 직무처리 중 얻은 타인의 비밀을 누설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고 규정하고 있으며, 의료법 제19조 제1항은 「의료인이나 의료기관 종사자는 업무를 하면서 알게 된 다른 사람의 정보를 누설하거나 발표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료인의 비밀 유지 의무는 윤리적인 영역에서 딜레마를 맞기도 합니다. 1976년 미국의 ‘테라소프 판결’은 의료인의 비밀 유지 의무가 갖는 딜레마 상황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캘리포니아 대학 병원의 한 임상병리사는 병원에서 치료 중이던 한 남학생으로부터 “변심한 애인 테라소프를 죽이겠다.” 는 말을 듣고 이를 병원 측에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은 이 보고를 묵살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남학생을 퇴원시켰습니다. 이후 실제로 테라소프는 이 남성에 의해 살해되었고, 가족들은 병원을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법원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법원은, “어떤 사람에게 사망과 같은 중대한 신체적 손상을 가져올 수 있는 경우와 같이 중요한 공익상의 이유가 있다면 의사는 환자의 비밀을 공개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 고 하며 병원 측에 배상을 명령했습니다. 이 판례는 ‘특정한 타인에게 위험이 발생할 합리적 예견 가능성이 명백한 경우’ 의료인의 환자에 대한 비밀 유지 의무가 깨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비밀 유지 의무의 한계를 명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의료인이 가지는 비밀 유지 의무와 이를 통해 겪게 되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결과에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는 소송, 치료에 의뢰인의 변호사에 대한 신뢰, 환자의 의사에 대한 신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비밀 유지 의무’는 크나큰 무게감을 가지고 있지만, 위와 같은 사례에서와 같이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면 방지할 수 있었던 비극, 혹은 밝혀질 수 있었던 진실이 의료인의 환자에 대한 비밀 유지 의무에 의해 가로막혔다면, 환자의 비밀을 유지한 의료인의 행위가 그 정당성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의사의 환자에 대한 비밀 유지 의무는 법률적 의무이기 이전에 도덕과 의료 윤리에 속하는 문제이기에 딜레마 상황에 빠지기 쉽습니다. 환자의 동의 없이 비밀을 공개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된 경우는 ‘법원의 명령(진료기록 제출명령이나 증거보전절차)이 있는 때’, ‘법률상 신고의무가 부가된 때(공중보건을 해칠 수 있는 법정 전염병 환자나 마약사용자의 발견 등)’ 이지만, 현실에서는 법률에 의해 비밀 유지 의무의 예외적 사항으로 규정된 경우가 아니어도 의무 준수의 예외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직면하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다음 글에서는 실제 한국에서 발생한 의료인의 비밀 유지 의무와 관련된 사건과 그에 대한 법원의 결정들을 살펴보며 의료인의 비밀 유지 준수 의무가 해석되는 방식과 그 의미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Medical Ethics: When a Dying Patient Confesses to Murder”, Neuroskeptic, 2018
“의료인 ‘환자 비밀 보호’ 중요하다”, 박형욱, 의약뉴스, 2019
http://www.newsmp.com/news/articleView.html?idxno=193050
[이슈추적]’환자의 비밀’ 어디까지 지켜야 하나, 동아일보, 2001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10618/7704131
‘변호사뿐만 아니라 의료인도 비밀유지의무가 있다’, 조진석, e-의료정보, 2018
http://www.newsmp.com/news/articleView.html?idxno=193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