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의 비밀유지의무와 그 딜레마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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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는 의사의 환자에 대한 비밀 유지 의무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비밀 유지 의무는 형법과 의료법에 규정되어 있기에 의사에게 부여되는 법률적 의무이지만, 그와 동시에 의료 윤리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때로는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 직면하기 쉽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법적으로 환자의 동의 없이 비밀을 공개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된 몇 가지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어도, 상황에 따라서는 환자의 상태나 정보를 알리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의사의 비밀 유지 의무 위반에 관하여 논란이 된 사건이 법원의 판결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과거 개그우먼 L씨가 운동과 식이요법만으로 30kg 이상의 체중을 감량하였다고 밝히며 다이어트 비디오 등을 만들어 판매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강남의 한 성형외과 의사 K씨는 L씨가 사실은 여러 차례 전신 지방 흡입 수술을 받아 체중 감량에 성공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L씨가 성형외과 의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것이 바로 그 사건입니다. 이에 대해 L씨의 수술 사실을 밝힌 의사의 행위가 환자의 비밀 보호 의무를 위반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공익을 위한 정당행위로 인정되어 비밀유지 의무 위반의 예외에 해당하는지가 논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성형외과 의사 K씨는 L씨가 수술 사실을 숨기고 다이어트 비디오를 3만장이나 판 것은 소비자를 우롱한 일종의 사기행각이고. 유명인사의 부도덕 행위를 알려 시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킬 공익상 이유가 있었다며 비밀 유지 의무 위반의 예외에 해당함을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그 공익은 의사가 관여할 바가 아니고, 개개의 구체적 환자에 대한 비밀을 지키는 게 의사의 의무라는 취지에서,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할 수 없음에도 피고들은 이를 공개, 환자의 비밀을 보호해야할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며 L씨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러한 판결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공익이란 개념은 추상적이고 자의적이기 때문에 비밀 보호 의무가 보호하고자 하는 환자의 프라이버시보다 우선하는 공익적 가치가 인정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의료인은 국민의 알 권리를 보호하는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사망한 환자에 대한 의료인의 비밀 유지 의무는 어떻게 적용될까요? 이에 대해서는 고(故) 신해철씨 과실치사 사건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대법원 판례가 나온 바 있습니다. 대법원은 2014년 10월17일, 신해철씨에게 위장관유착박리 수술을 집도해 같은 달 27일 숨지게 한 혐의(업무상 과실치사)와 신씨의 의료기록 등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업무상 비밀누설 및 의료법 위반)로 기소된 의사에 대하여, “의료법 제19조(정보누설금지 조항)은 ‘의료인이나 의료기관 종사자는 진료기록 등 업무를 하면서 알게 된 다른 사람의 정보를 누설하거나 발표하지 못한다’고 정하고 있는데, 비밀누설 금지조항의 ‘다른 사람’에는 생존하는 개인 이외에 이미 사망한 사람도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고 하며, 그 근거로 ”의료법상 비밀금지 의무는 개인의 비밀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비밀유지에 관한 공중의 신뢰라는 공공의 이익도 보호하고 있다고 봐야 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환자가 사망한 후에도 그 본질적인 내용이 변한다고 볼 수는 없다.“ 는 점을 들었습니다.

또 다른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혈액 검사 결과 HIV가 양성으로 나온 환자가 부인에게 자신의 감염 사실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요구한다면 의료인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와 관련하여, 전염병예방법(제4조)과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제5조)에서는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고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의사 또는 의료기관등의 신고』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중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5조 제1항은, 『감염인을 진단하거나 감염인의 사체를 검안한 의사 또는 의료기관은 보건복지가족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즉시 진단·검안사실을 관할 보건소장에게 신고하고, 감염인과 그 배우자(사실혼 포함) 및 성 접촉자에게 후천성면역결핍증의 전파방지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알리고 이를 준수하도록 지도하여야 한다. 이 경우 가능한 한 감염인의 의사를 참고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감염인의 의사를 참고하되, 감염인과 혼인한 사실이 있거나 성적인 접촉을 하는 자에게는 감염인의 감염 사실을 알릴 수 있도록 하여 사실상 비밀 보호 의무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은 환자의 비밀을 제3자에게 알릴 수 있도록 규정한 거의 유일한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후천성면역결핍증과 같은 경우 환자의 비밀과 사생활을 보호하는 것 보다 환자와 성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관계에 놓여져 있는 제3자의 건강이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의 가치가 더 크고, 전염 사실을 알리지 않을 경우 제3자의 건강이나 안전이 위협당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므로 환자의 비밀을 알리는 것이 윤리적, 법적으로 정당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세 가지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전염병과 같이 감염 사실을 알리지 않을 경우 제3자의 건강과 안전에 직접적으로 피해가 갈 것이 거의 명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대한 공익상의 이유와 같은 추상적인 관념을 사유를 들어 환자에 대한 비밀 유지 의무를 져버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글에 언급했던 테라소프가 살인사건의 경우 가족들은 대학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법원은 사망과 같은 중대한 신체적 손상을 가져올 수 있는 경우와 같이 중요한 공익상의 이유가 있다면 환자의 비밀을 공개하고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는 점에서 학교 측에 배상을 명령한 바 있지만, 이는 ‘특정’한 타인에게 위험이 발생할 ‘합리적 예견가능성이 명백한 경우’ 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전염병 감염 사실을 고지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 놓여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사의 환자에 대한 비밀 유지 의무는 환자의 내밀한 사적 영역을 보호하는 것이 인간 존엄과 가치,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규정한 헌법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관념적 개념인 공익적 사유와는 쉽게 맞바꿀 수 없는 중요한 의무임과 동시에 그 의무 위반의 예외를 인정하는 것이 매우 까다롭고 어렵기에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하기 쉽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과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의료인의 환자에 대한 비밀 유지 의무와 관련한 사건과 판례를 통해 의료인의 비밀 유지 의무와 관련해보다 명확한 기준과 원칙이 성립될 수 있기를 기대해보며,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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