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일성 문제(non-identity problem)

쌍둥이

심한 여드름으로 고생하는 한 여성이 이소티논(isotretinoin, 피지 분비를 억제하여 여드름 질환을 치료하는 약) 처방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아가자 의사가 묻습니다. ‘임신을 하시진 않으셨나요?’ 임신을 한 상태에서 이소티논을 복용하면 베고 있는 아이에게 뇌 손상을 초래하기에 나온 물음이었습니다. 여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피임약도 같이 복용하면서 임신 시기는 뒤로 미뤄야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가 생각해보건대 지금 이소티논을 복용하면서 피임을 하지 않는다면 뇌에 손상을 입은 아이 A를 낳게 됩니다. 하지만 이소티논과 피임약을 같이 복용하고 여드름이 치료가 된 나중에 두 약을 모두 끊고(6개월 뒤) 임신을 한다면 정상인 아이 B가 태어나죠. 여기서 아이 A와 B는 명백히 서로 다른 정체성(identity)을 갖습니다. 처방에 영향을 받아 선택하기로 한 임신하는 시기가 달라지기 때문이죠. 현재 아이는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부부가 임신하여 생긴 존재인데 만약 해당 과거의 그 시점에 부부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현재 그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처방이 미래에 태어날 아이의 정체성을 바꾸어 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임신을 했다면 태어날 아이가 A라고 했을 때, 처방에 영향을 받아 6개월 미룬 임신으로 태어날 아이는 A가 아니라 B가 되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미래 세대를 위한 선택을 고려할 때 제기되는 문제인 비동일성 문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처방에 따라 여성은 당연히 태어날 아이 A에게 야기할 해(harm)인 뇌손상을 피하기 위해 임신을 6개월 미루는 결정을 합니다. 그러한 선택으로 인해 다른 정체성을 지닌 존재, 정상인 B를 낳게 되죠. 하지만 이 숙고에 앞뒤가 맞지 않는 문제가 존재합니다. A에게 야기할 해를 피하기 위해 B가 태어났기 때문에 A는 미래에 존재조차 못하게 된 것이죠. A의 입장에서 이 결정은 정말로 A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는 아프더라도 존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렇다고 본다면 A에게 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 처방 시기에 A를 낳지 않은 것이 A에게 더 큰 해악을 야기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상 미래에 존재하지도 않는 A에게 해를 끼쳤는지를 따지는 것은 논리적으로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 현재 어떤 결정을 하든 태어날 아이에게 피해를 야기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를 태어날 아이 A와 B가 다른 정체성을 갖기 때문에 야기되는 문제라고 하여 비동일성 문제, 영어로는 non-identity problem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비동일성 문제는 두 가지 주장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어떤 정책 선택과 미래 세대의 정체성이 관련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존재하지 않는 것(non-existence)보다는 존재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주장

이 주장은 어떤 개체의 정체성이 특정 정자와 난자의 결합과 관련된다는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유전자의 결합이 성격이나 신체 상태를 결정한다는 입장이 어느 정도 상식이 되어 있어 이 주장은 대부분 받아들여집니다.

두 번째 주장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가치가 있다는(worth living) 주장은 안락사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타당하지 않게 들릴 것입니다. 그들은 상황이 힘들다면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의 의미는 안락사나 자살에서 의미하는 비존재, 즉 존재하면서 겪는 고통 등으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려는 의미에서의 비존재가 아닌, 존재해본 적이 없는 비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장 역시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이런 비동일성 문제에 따르면 현재 어떤 선택도 미래 아이에게 해악을 끼지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소티논을 처방받고 피임을 하지 않아 뇌에 손상을 입은 A가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아이에게 해를 입힌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부부가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고 할 수는 있지만 아이에게 해를 입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방 중에 임신하여 뇌 손상을 입은 A와 6개월 이후 태어날 정상인 B는 서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동일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태어날 아이나 미래 세대를 위한 환경정책과 활동 등이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비동일성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 아이들을 위한 결정을 할 수 있을까요? 선택하기 위한 도덕적 숙고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 Tony Hope, John McMillan, “Physicians’ Duties and the Non-Identity Problem”, AJOB, 2012.

– 목광수, 기후변화와 롤즈의 세대 간 정의 파핏의 비동일성 문제를 중심으로, 환경철학, 2016.

 

<이미지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donnieray/9477327336 비상업적 용도로 재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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